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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어느 저녁
한차례 비가 쏟아진 하늘엔 연한 보랏빛을 띤 노을이 천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당시 그 도시에서 한시라도 빨리 도망가고 싶었던 나는 내 생활의 전반을 정리하느라 꽤나 지쳐있는 상태였고, 나는 지난 9개월 간 망부석처럼 눌러 앉았던 가게에서, 내 자리를 대신해 주실 직원분과 함께 일을 했던 날이었다.
“이번에 가면 언제와요?”
나는 대답했다.
“글쎄요”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그와 나는 너무 늦기 전에 가게를 나섰고, 그 다음 블록에서 다음을 기억하며 헤어졌다. 나는 홀로 그 새 해가 다 저물어 어둠이 내려앉은 밤을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당연히 여기던 풍경에서 멀어지는 게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 앞서 말한 그 “다음”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나는 다신 이 풍경 속에 숨 쉬는 게 불가능하겠구나 하면서 말이다.
039. 근황
통행제한 기간에서 벗어나 파리에서 보낸 한 달 반은 마치 총알처럼 빠르게 나를 관통했다. 입시결과가 나오고, 잠시간 우울해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정하고, 유유자적 새로운 사람들과 파리를 거닐고, 정말이지 지겹다가도 매력적인 개미지옥 같은 그 도시에서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벗어난 게 벌써 일주일이다. 나는 지금 파리의 보랏빛 노을이 아닌 한국의 콘크리트 숲으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우울과의 전쟁이었던 지난 4개월은 결국 나의 패배였다. 나는 연달아 쏟아지는 대학 입학 지원 서류 분실 소식에, 뒤이어 들려온 마지막 학교의 불합격 통지에, 그리고 전혀 해결되지 못한 서류 때문에, 아무래도 나의 정신력이 버티지 못한 듯하다.
믿기지 않으면서도 이게 또 현실이 아니면 뭐가 현실이겠나 싶다. 2개월 간의 콩피느멍 이후엔 벌써 기억도 가물해진 귀국 정리,그리고 다시 2주 간의 자가격리라 지금은 익숙해졌는지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 여기서 또 외면하면 또 어디로 도망갈래. 하는 생각을 가슴에 얹고, 일단은 작전상 일보 후퇴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남자 주인공이 누나와 나눈 마지막 대사가 떠오른다. 대사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공감해주길 바란다. 그 한 줄이 내가 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