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 이미 우리 사이에서 유행한 지 오래된 말이 있다. 나는 남들에 비해 이 단어는 적게 사용하고, 이에 대치되는 다른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부스러기만 있어도 행복해. 이런 말이다. 학교를 다니며 느낀 것은 내가 참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나는 관심을 필요로 한다.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당연한 이야기다. 나의 부모님은 그들이 가진 사랑의 파이를 같은 크기의 조각으로 나누어주셨다. 그 삼분의 일의 파이가 하나 전부인 줄 알았던 어린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는 대신 (사실 많이 슬프진 않았지만) 내 접시의 나머지 부분을 다른 것들로 채워나가고자 했던 것이 나의 부스러기론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가르침이다. 나를 이루는 것들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삶은 그 다양한 것들을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것 말이다.
하여튼 내가 사람을 만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고 서운해 하지 않는 것이다. 십 대 땐 나의 가장 친구인 줄 알았던 이에게 나는 많은 친구들 중 하나이었던 것처럼. 그 아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홀로 상처받았던 그때는 모두가 나에게 내 부모님 만큼의 파이를 줄 것이라 착각했기에 생긴 오해다. 그러므로 나는 남에게 바라는 것을 천천히 줄여나가기로 했다. 피자 한 조각만큼이면 어때. 그 친구와 즐거웠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 걸. 하루하루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상처는 아물고 또 생기고, 자잘하게 남은 마음의 흉터만큼 경험이 쌓이고 내가 사람에게 원하는 크기도 작아진다. 그리곤 깊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곳에 오고 나서야 마침내 나는 부스러기에 이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인에게 충분한 파이를 주변에 나누며 자랐길 바란다.
흙을 밟으며 걷는 것을 좋아한다. 이유는 그냥,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서. 그것에 닿으면 발바닥이 따가워서,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우리는 그 품을 산책하며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같을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갈 수록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적어진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촉마저 익숙하지 않았던 아기들이 어른이 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이미 많은 새로운 것들을 접하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손에 닿는 것과 닿지 않는 것들을 경험하고, 우리는 그것을 구분하게 되었다. 나를 이루는 커다란 경험의 조각을 간직한 채. 지금 나는 절기마저 다른 이곳에 와있고, 삶이라는 무한한 파이에서 파생된 행복을 느끼고 있다. 예컨데 나에겐 한참은 이른 2월에 만개한 꽃가지를 보며 미소 짓고 이 기분을 주변에 나누는 것.
“벌써 꽃이 피었네. 예쁘다”
“나는 아직 추워. 아프리카 사람이잖아”
나에겐 벌써 누구에겐 아직.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처음부터 나의 것은 없다. 자연의 부스러기를 먹고 자란 나는 그것을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꽤나 좋아한다.
092. log
“나는 지옥에 갈거야”
“나도“
“음…미안해 얘들아 나는 별로…”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너도 우리랑 같이 가야지”
093. log
“요즘 우울해보이던데 괜찮아?”
“의욕이 없어”
“우리가 배우는게 너무 이론적이긴 하지”
“그게 아니야.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
“겨울이 길어서?”
“아니, 그냥 그런거지. 나는 유급을 두 번 했고 과를 옮겼지만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어. 지금 행복하지 않아. 하지만 난 십 대 시절에도 행복하지 않았고, 그땐 미래가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모르겠어”
“미래가 있잖아”
“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반복되지 않을 수 있지. 연대에 따르면 지구는 빙하기와 간빙기를 50번이나 반복했고 우리 세대는 빙하기여야 했지만 인간에 의해 빙하가 녹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