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1
054. 어느 저녁
얼마 전엔 아이패드를 샀다. 이젠 공부를 그만하고 싶어서 원래 있던 아이패드도 팔아버리려 했는데 다시 학업을 연장하게 되어 그냥 새로 구매하게 되었다. 내가 쓰던 모델은 아이패드 프로 1세대, 그것도 9.7인치로 요즘은 케이스도 찾아보기 힘든 모델이라 슬슬 보내줘야지 하고 있기도 했다.
모든 강의가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체육관도 닫아 아예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어느 날 하릴없이 온라인 서핑을 하던 나에게 애플 신학기 프로모션이 눈에 띄었다. 어차피 태블릿을 하나 사야지 하던 차에 발견한 터라 나는 디자인도 확인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색깔을 골라 담아 주문을 했는데 받아보니 상판 전체가 새카맣고 홈버튼도 없더라. 홈버튼이 있는 모델이 좋아서 아이폰 11이 출시된 시점에 아이폰 8세대를 재구매하고 아이패드 구세대를 안고 가던 나의 과거가 떠오른 순간이다.

생각없이 미리 주문해줬던 필름을 붙였다. 요즘은 후면에도 필름을 붙인다기에 이것저것 꺼내보다가 손이 가는 대로 필름을 뜯었다. 나는 전면 스크린만 종이질감을 시켰는데 왜 후면에도 종이 질감이 온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대수롭게 여기진 않았다. 어 이건 후면 카메라도 안뚫려있네, 그냥 내가 뚫어서 쓰지 뭐. 하며 대강 후면을 바르고 나머지 필름을 집어 드는 순간 깨달았다.아 이게 후면 필름이구나. 심지어 그건 카메라 구멍도 깔끔하게 칼선이 있더라. 나는 일단 붙인 것을 떼고 새로 붙였다. 내 새로운 아이패드엔 실패한 흔적이 가득이다. 뒷면은 내 눈에 안보이니 괜찮다.
055. 무제
한동안 시험 두 개를 동시에 준비하다 보니 정말이지 머리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 남들은 다 한번에 통과한다는 시험을 난 뭐가 부족해서 재수까지 하는지 자책을 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지난 겨울에 하나 1월 초에 본 시험도 합격을 하고 지금은 다른 시험을 준비 중이다.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과학을 공부리라 생각했는데 인문계로 전공을 바꾸고 교양을 채우다 보니 머릿속이 말이 아니다. 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뭐랄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모르겠다.하여튼 아주 지루하고 지겨운 동시에 재밌다. 내가 이렇게 지식과 교양이 부족했는지 절실히 느끼는 중이다. 시험 직후 급하게 들이켠 지식이 단번에 휘발되는 느낌도 나름 즐길 만하고, 그렇다. 도대체 다들 이렇게 지겨운 짓을 해내는지, 직접 해보니 정말 존경스럽다.
056. 늦었다고 생각할 때
진짜 늦었다는 박명수의 말이 참 일리가 있다. 예를 들자면 그것은 운동이다. 한국에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남에 따라 서울과 수도권은 방역조치를 2.5단계로 상향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내용에 실내 운동시설도 포함이었다. 체육관이 닫으니 나는 별 수 없이 방에만 있었고 대중교통도 여행을 갈 곳도 마땅치 않아 집에만 있었더니 당연히 체중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만, 모든 맥락을 제외하고 내가 정말 늦었다고 생각한 시점은 이거다. 의자에 앉는데 뼈마디가 삐그덕 거리는 느낌.
“살이 찌니까 허리가 아픈 것 같아”
“척추 옆이 찌르르하지 않아?”

하는 대화를 나누길 며칠 전이다. 그리고 잊지 말자. 근손실은 방심할 때 찾아온다는 것을.
057. 로그
2.5단계 규제가 완화되며 성관과 아주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오빠가 나가 살고 나선 원체 만날 일이 없어서 오늘 아주 모처럼 가족끼리 모였다가 모두 일이 있어 일어나고 나와 성관만 남은 것이다. 유학을 나갔을 때부터 오빠와 하는 대화는 늘 같다. 뭐해? 뭐하고 지내? 혹은 잘 지내? 하는 것들. 성관은 이태원의 음악가로, 코로나 이후엔 업계가 마비되어 한참 암울한 시기를 보냈다고 했다. 그동안 연락이 뜸하던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우리는 여태 우리가 달려온 것과 다른 “길”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그동안 지내온 일, 최근 출시된 게임까지,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끄집어내고 나서야 입을 놀리는 것을 멈췄다.

“하여튼 그래서 하고싶은 건 있어”
“잘해봐”
“저번에 산 빈티지 바이크가 시동이 안 걸려”
그거 고쳐야 해. 오빠는 그런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충분히 영감은 받고 있어. 그런 거 있잖아. 영화 아키라나, 뭐, 기술을 배워야지. 가게를 차릴 거야.여러모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도 꿈을 찾는 게 참 안심이 된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가 있던 스타벅스 직원의 코로나 바이러스 예방에 대한 안내 음성이 들렸다. 카페 이용 제한 시간을 넘긴 지 이미 한참이다.
“이제 가. 나도 공부해야지”
더 얘기해도 좋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 얘기는 다 했고 달리 갈 곳도 없어서.
“어 일해야지”
오빠는 마치 어제 만난 듯 그냥 갔다. 나도 아쉽진 않았다. 역시 형제는 가끔 봐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