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8, 07, 2023

cmmntvst 2023. 7. 28. 15:29


128. 이튿날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건 커다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 무음 선풍기가 만들어내는 진동, 분리불안이 있는 이웃집 개가 짖는 소리, 매미가 우는 소리…그리고 답답한 공기.
 
 
 

 
 
한국에서 맞는 아침이다.
 
저녁 내 열어 두었던 방문이 닫혀 있었다. 이러니 답답하지. 아직 시차적응 중인 딸을 위한 부모님의 배려이리라. 에어컨의 냉기가 남아있음에도 왠지 땀에 절어있던 나는 습한 눈을 끔뻑이며 몸을 일으켰다. 눈뿐만 아니라 공기도 눅눅한 것이. 장마철은 장마철이고 여름은 여름이다. 대체 지금이 몇 시지. 나는 거의 14시간을 꼬박 잤다. 가족들 모두가 집을 나선 시간이었고, 인간의 손길 없이 웅웅대는 기계의 소음이 나를 깨운 것이다.
 
“계세요?”
 
역시 아무도 없군. 거실엔 게임기 뭉치가 있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오빠를 보고 싶다며 성화이기에. 이번에 새로 출시된 게임팩을 하고 싶다는 핑계로 졸랐더니 새벽에 집에 들러 두고 갔단다. 줄 것이 있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128. MBTI


-       너 엠비티아이가 뭐랬지?
 
-       나? 나 별로 말하는 거 안 좋아해. 나도 한 때 좋아했는데 점점 생각이 거기에 매몰되는 것 같아서… 사람을 대할 때도 너무 거기에 치우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거기에 너무 치우치지 않으려고. 상대는 대화를 통해 알아가면 되니까..
 
-       그래? 나는 재미있는데
 
-       오 그래? 어떤 점이?
 
-       그냥 평생 이해한 적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을 거기에 빗대어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인 것 같아서
 
-       나랑은 다른 관점이네
 
-       맞아 근데 그래서 나는 너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어
 
-       그래?
 
-       응
 
-       …그럼 나도 다시 좋아해 볼래. 그렇다면 나쁠 것도 없지
 
-       그래서 네 엠비티아이가 뭐랬지?
 
-       맞춰봐
 
-       나랑은 많이 다른 건 알겠다.
 
 
 
 
129. Log

“들어봐. 너한테 친구가 있어. 너무 잘 맞아. 잘 맞아서 빨리 친해졌어. 근데 자꾸 어디냐고 물어보고 뭐 하냐고 물어보고 같이 있다가 멍만 때려도 무슨 생각하냐고 물어봐.”
 
“오케이 그래서?”
 
“아니 나는 딱히 하는 게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어서 그냥 별 거 없다고 하지”
 
“근데?”
 
“그럼 더 물어보는 거야. 학교에선 뭐하는지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으면 그 안에서 뭘 했는지. 당연히 공부를 했겠지 학생이, 내가 친구가 많지도 않고 뭘 하겠어”
 
“어어 그렇지”
 
“그렇지. 그리고 내가 짜증 나서 적당히 하라고 하면 이제 또 싸워. 진짜 난 내가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싸울 줄 아는 사람 인걸 처음 알았어. 머리가 정말 울릴 정도로”
 
“흠…”
 
“어떻게 생각해?”
 
“연하야?”
 
“너 어디 아프니?”
 
 
 
 
130. 무제
 
이십 대 초반엔 우울의 수렁에 잠겨 있었다.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그렇게 행복한 아이는 아니었다. 대입도 썩 만족스럽게 하지 못했고. SNS를 끊지도 못하면서 남들의 소식을 볼 용기도 없었던 열등감 덩어리. 그 시기의 나를 그나마 좋게 평가해 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왔다는 점과 열등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 정도일 테다. 고등학생 때 만난 친구들이 취직을 하고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섰을 땐 정말 에고가 끝도 없이 자라나서 그들을 축하하는 마음보단 나를 미워하는 감정이 더 크게 느껴졌고. 그들을 무조건 부럽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그 시기로부터 적어도 3년이 지났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해서 내 주변인들의 생활모습도 정확히 내가 변한 만큼 바뀌었고. 그들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만큼 나도 그들을 좋아한다. 애초에 친구 사이란 서로가 서로를 선택했기에 친구일 수 있는 것이다. 관심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었고, 각자의 중대사를 겪고 있다.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린 사람들 그리고 내릴 사람들. 나는 오래간만에 만난 그들과 몇 시간이고 앉아 떠들면서 나는 머릿속이 전보다 맑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전엔 어느 순간 대화 중 반박할 거리를 찾고 있었고 그것이 눈에 띄는 순간은 마치 투명한 물에 먹물 한 방울이 퍼지는 느낌. 혹은 구름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하여튼 한국에서의 3주를 포함해 최근 반년은 나는 그런 감정을 겪지 않았다. 마침내 그 구름아래의 보이지 않는 바닥을 닿은 듯하다. 바닥은 괴물도 고통도 없었다. 그곳엔 오롯이 나만이 있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나.

상여자의 발자국

 
“엄마. 이번에  A는 미국에서 박사 제의를 받았대.”
 
“잘됐네”
 
“B는 유예 없이 석사를 졸업한대 너무 똑똑하고 멋있지 그래서 선물을 하고 싶은데 각인 펜 어떨까? 상징적인 느낌?”
 
“괜찮네”
 
“그리고 엄마 그 S기억나? 걔는 이번에 큰 프로젝트가 끝나서 구경하러 오라고 초대받았어. 날짜가 안 맞아서 못 가지만..”
 
“그 저번에 말한 걔?”
 
“응 S”
 
“잘됐네”
 
“이상하지. 이젠 좋은 소식을 들으면 그냥 기뻐 부럽지도 않고”
 
“그래?”
 
“응”
 
“그냥 나도 열심히 해야지 싶어. 궤를 같이 하고 싶어서..”
 
엄마는 내 얘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 애들의 친구이기 이전에 엄마의 딸이니까. 그도 내 변화를 눈치채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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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전에 업로드 성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