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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 장밋빛 여름
벌써 6월이 반틈을 넘겼다. 작심 삼주의 과학은 역시나 이번에도 통했다. 만개한 5월의 장미를 보며 프라고나르의 5월의 장미라는 향수를 살까 고민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달력이 한 장을 넘겨버린 것이다. 날이 너무 더워지다가 비가 오면 조금 식다가, 또 다시 눅눅해지고, 비가 오고 그러길 몇 주다. 30도를 넘기며 치솟는 기온은 부정할 수 없이 요즘을 증명한다. 그래 여름이다. 여름이 왔다. 여름은 맞이한 우리는 여행 계획을 세우고 미루고 또 다른 생각을 하다가 한다.
“…덥지 않아?”
반갑지 않은 여름일지라도 즐기는 법은 안다. 뇌를 녹이는 더위를 식혀줄 것들 말이다. 우선 날이 너무 더워지기 직전, 나의 부모님은 수박을 사두시기 시작한다. 벌써 수박이 나와? 아직 맛이 들 들었어. 그건 아마 수박이라면 환장을 하는 이 집의 막내딸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데, 그에 따른 나의 방법은 이거다. 한통을 모두 깍둑 썰어 담아 놓는 것. 작년이었으면 거진 반틈은 넘게 내가 해치우던 것을 요즘은 그들도 채식 생활을 시작한 탓인가 빠르게 군다. 이제 곧 살구도 자두도, 천도 복숭아도 나오겠지. 채식을 하는 부모님과 편식을 하지 않는 우리는 올해 여름도 맛있고 신선하게 보낼 것이다. 엊그제는 시골에 다녀오시며 감자를 캐고 살구를 따오셨다. 마치 전원생활을 하는 이들처럼 말이다. 그만큼 맛있다는 뜻이지!
068. Log
일년밖에 다니지 않은 대학이지만 얻은 것이 참 많다. 사람, 사람, 그리고 대학생활의 경험과 추억 정도. 그 중 내가 동기라 부르는 이들은 같은 과를 나온 단 두 명이다.그러니까 나까지 합해 세명인 무리. 초등학교 동창은 없고 중학교 동창은 거의 전멸했다. 심지어 고등학교 동창도 무리로 만나는 이가 없는 나로선 참 드문 일이다. 하여튼 망원동에서 만난 우리는 한강 주변의 한 카페에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했다. 그래서 요즘은 그래. 알바는 어떻고 최근에 무얼 먹었는데 맛있었고 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 카페의 창가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어? 우리 저거 그린 적 있지 않나?”
“래경이 드림카다”
좁은 골목에 벤츠 지바겐이 지나가자 두 친구가 동시에 말했다. 그, 그 교수 있잖아. 진짜 싸가지 없었던. 난 막판에 그냥 안 나갔어.그 수업은 나오는 애들이 없었어. 학교 얘기라면 잠자코 듣기만 하던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 사람?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 나도 그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네가 어떻게 알아?"
“나 그땐 학교 다녔지”
우리 모두 오 년이나 지나서 가물한 거다.그 교수는 정말 최악이었어. 스물 다섯의 우리는 아직도 입 모아 말한다. 그리고 한가지 보태자면, 나의 드림카는 그때를 기점으로 바뀌었다. 지바겐은 평생 차 그림은 그려본 적도 없는 내가 잔뜩 그려봤으니 그 정도로 충분하다. 참 싫은 교수였지만 딱히 관심이 있지도 않았던 우린 대화 주제를 빠르게 돌렸다. 그것도 아주 생산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우리 올 여름에 여행 갈까?”
“어디?”
“글쎄 순천?”
“순천만 거기?”
“응 우리 저번에 춘천 갔으니까 천자 돌림으로”
“좋아”
여전히 지바겐은 없지만 우리는 여행을 갈 거다.학교는 그저 스쳐온 공간일 뿐.
069. Log 2
“…그래서 조금 예민한 주제들 있잖아. 페미니즘이나 약자 혐오,사회복지 관련된 그런 것들”
“엉”
“나는 솔직히 그런 거 안 좋게 생각했어 그동안 너무 격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렇군…”
“응 근데 요즘은 천천히 배워보고 싶어. 반드시 그게 옳다는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무슨 말인지 알지?”
정말 멋진 대화를 했던 나와 A. 나는 이런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것임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