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길었다. 우리는 아웅다웅 23번 건물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고 때로는 많은 시험을 치르고, 대화를 했고 때론 꽃가루가 폴폴 날리는 산에 함께 가 음식을 나누어먹고, 서운해하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지금 우린 학기말에 다다랐으며 몽펠리에는 여름에 접어들고 있다. 시간은 벌써 4월의 중반에, 많은 것들이 그대로이며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이제와 느끼고 있는 건 나는 이제야 타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같다의 어미를 붙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변화는 나 또한 뭐라 정의 내릴 수가 없는 모양이라, 그냥 내가 느끼기에 그렇게 보인다. 항상 말하건대 나는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어서 아주 어릴 땐 조금은 겉돌았고 고등학생 땐 괴로웠으며(이제는 엠비티아이로 2퍼센트 정도 설명이 된다) 이십 대 초반에야 내가 편한 사람들만 친구가 되었고 이십 대 후반에 이르어서야 다시 학교를 다시 다니고 있는 나는 끊임없이 내게 관심을 가져준 동기들과 2년이 넘는 줄다리기 끝에 인간다운 교류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방어적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보며 물음을 던지면 그 상대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던 상황이 십 수년을 거처 반복되었기에 나도 웬만해선 그들이 원하는 말을 골라서 한다. 때론 그들도 나도 상처만 받고 끝났기에 이건 모두를 위한 방어기제이다. 물론 성격을 못 참고 막 뱉을 때도 있지만, 그 상황에 익숙해지며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지고, 무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택하고, 뭐 그랬던 것 같다. 표정이나 눈치를 보는 것조차 나는 알 수 없는 분야였으니 오히려 나는 물가에 앉아 물 그림자를 보거나 나무의 흔들림을 보는 것이 더 좋았다. 공기의 흐름에 맞춰 일렁이는 자연엔 그 안에 내가 읽어야하는 감정이 없으니까, 방 안에서 바라보는 빗속의 노란 가로등이 하루 끝의 마음에 얼마나 평화를 가져다주는지 아는가. 사실 나는 고양이나 강아지도 어렵다. 복슬한 털은 귀엽지만 그 애들이 바라는 것을 모른다. 내가 동물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학습된 감정이다. 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기에 그 감정이 기꺼울 뿐.
그런 나완 다르게 요즘 내 주변의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꽤나 솔직하다. 그리고 존중하는 법도 아는 듯하다. 많이 배우고 있다. 다른건 이런거구나 하는 느낌.
우리 사이엔 짠하디 짠한 짝사랑을 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대개 대화의 주제가 연애로 흐르게 되면 관심이 사그라들기에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남들과 있을 때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아하진 않아서 나는 고개를 쭈욱 빼곤 턱을 괴었다. 머리를 기댈 수도 있고 관심 있게 듣는 듯 보일 수 있고 꽤나 유용한 자세다. 그리곤 곧 뜬 눈으로 몽상에 잠기곤 하는데, 그날은 그런 나의 머릿속을 깨고 A의 목소리가 들렸다. 래경, 레귬(legume : 야채, 내 이름과 발음이 비슷함), 듣고 있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
”안듣고 있었지?“
”응..“
"요즘 그 애가 답장을 안 해"
너에게 흥미가 없나 보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랬다간 주변의 반발이 예상되기에 나는 말을 바꾼다. 턱이 저렸다.
"너는 걔가 왜 좋은데? 그 애가 널 무시하면 너도 상처받잖아"
A는 설명한다. 요약하자면 그 애는 나를 잘 챙겨줬고. 나를 지켜봐왔고 무엇보다 착해서. 라고 말했던 것 같다. 말이 길었다. 그 애의 이야기를 듣곤 나는 말했다. 그럼 너는 그때의 그 애가 좋은 거 아니야? 내가 듣기엔 지금의 걔와 그때의 걔가 다르게 들려.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T가 말하길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야"
"아 그렇군"
그리고 사랑에 빠진 여자애는 아주 귀엽지. 얘를 봐. T는 숨김이 없다. A는 말 그대로 귀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곤 내게 물었다. 너는 대체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대답해야 했다.
"사랑은 관념적인 거야"
마치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듯, 몇 천년에 걸쳐 인류를 지탱해온 힘이지만 그것엔 실체가 없지. 그러자 T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 애는 가끔 그런다. 뭐든 꿰뚫어보겠다는 그 표정.
"그리고 그건 유형으로 증명되기도 해"
"가족의 지지를 안고 공부하는 우리들처럼?"
"우리 연애 이야기 하는거 아니었어?"
"그리고 누군가 내 삶의 순간들을 사랑하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나는 그랬노라 대답할 수 있어 “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런 순간들이 있어. 네 머리카락의 나뭇잎을 누가 떼어줬더라? C였지? T는 말을 거뒀다. A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그리고 그 뒤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또 다른 두 명. 여덟 개의 눈알. 너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싶은지 나는 모르겠어. 나는 눈 앞의 칵테일을 마셨다. 시원하고 쌉싸름한 초여름의 맛.